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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잡담

위키로 알아보는 삼일절과 태평양전선...

삼일절..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에 삼일절에 대하여 조사해 보았다...


3·1절은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1]이자 공휴일이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른다. 이날에는 정부 주최로 기념행사를 통해 순국선열에 대한 추모와 애도의 의미로 묵념을 올리며, 민족정신을 되새긴다.

3·1 운동(三一運動)은 민족자결주의와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불복종 운동과 중화민국의 5·4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7년 3·1절에는 제주에서 제주 4·3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경찰의 발포사건(제주 3·1절 발포사건)이 일어났다.

삼일절노래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여기까지가 삼일절에 대한 위키의 조사결과다..덤으로 중화민국의 5.4운동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5·4 운동

중국 5·4운동(五四運動)은 1919년, 러시아 혁명과 조선의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의 근대화를 서두르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운동이 혁명운동으로 발전한 정치운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 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文學革命:1917년)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 5·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항하였는데 톈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운동은 이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5%C2%B74_%EC%9A%B4%EB%8F%99’

그 이후 태평양전선 상황에 대해서도 조사해 보았다. 물론 위키 백과 사전이닷...

태평양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필리핀과 파푸아뉴기니, 오스트레일리아를 잇는 선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 서부 해안과 알래스카를 잇는 잇는 벌어진 전투 및 에피소드에 관한 분류이다.
이 전역에서 연합군 중에서 미군의 비중이 높고, 영국군과 중국군의 비중은 높지 않으며, 대부분이 섬에서 벌어진 전투라 해전과 상륙 작전, 그리고 일본 본토 공습으로 특징지어진다.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 침략을 개시하고,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여 1945년 8월 14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기까지 태평양과 아시아의 영역에서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일본과 중국의 충돌
19세기 말, 중국의 혼란과 일본의 빠른 근대화로 두 나라 사이에는 갈등이 쌓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만주를 그 영향권에 넣는 동안, 중국은 군벌의 난립으로 그 영향력이 약해져 있었다.

이 상황은 1920년대에 들어와 조금씩 바뀌게 된다. 1927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 북벌에 나선다. 중국 남부와 중부의 군벌을 물리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북부의 군벌에게 충성을 요구하게 된다. 위협을 느낀 장쉐량이 장제스 쪽으로 기울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푸이를 황제로 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게 된다. 일본의 행동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자 일본은 국제 연맹을 탈퇴한다.


중일 전쟁
이 부분의 본문은 중일 전쟁입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의 확전
일본은 중일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을 위한 지하자원 및 원료의 부족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게다가 미국이 중일전쟁을 치르던 일본정부에 대해서 중국, 대만, 만주, 한국 등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대의 완전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온갖 노력을 기울여 일으킨 전쟁이기에 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39년, 미일통상조약은 파기되어 양국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으며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철광 등과 지하자원 수출을 완전히 중단시킨다.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한다.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프랑스 식민지 인도차이나 침공이었다. 석유, 고무, 철광 등의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진격하기 위해 일본이 세운 방법이다. 그 당시에 유럽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군이 네덜란드, 벨기에, 폴란드 등을 모두 무너뜨리고 파죽지세로 서진, 프랑스를 정복하여 페탱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괴뢰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이 때 영국에서 망명정부(자유프랑스)를 세우고 독일에 항전 중이던 드골로서는 인도차이나를 도저히 사수할 수 없었다. 결국 인도차이나에 있던 프랑스군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대파당하고 만다.

인도차이나 침공이 성공한 후에도 일본은 더욱 많은 곳을 지배하길 원했다. 그리고 1941년, 군인출신인 도조 히데키를 수상으로 한 군부내각이 들어섰다. 이들은 군부의 여러 인사들 중에서도 매우 강경파로서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것은 곧바로 진주만 공격(1941.12)으로 이어지게 된다. 선전포고도 없이 이루어진 기습공격이었다. 이 사건으로 만 4년 8개월 동안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미국의 참전

일본 멸망!!!

뭐..멸망까지는 아니지만 패전국으로 범죄재판까지 갔지만 다 덮어 두었다...강자의 논리에 따라서...
학교다닐때만 역사공부를 죽도록 하였지만 사회활동을 한 이후...거의 관심밖이었다....그리고 기억에서 점점 희미하게 퇴색되어지고 있었다...가끔이라도 우리의 과거를 뒤돌아 볼 시간을 내어보자....